균생(菌生)역전? 곰팡이의 ‘고귀한 부패’
균생(菌生)역전? 곰팡이의 ‘고귀한 부패’
  • 정기흥
  • 승인 2016.03.17 15:35
  • 조회수 4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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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blog.daum.net/spectrum1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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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무슨 곰팡이마냥 집에만 붙어있니!?” 

기자 주위엔 미래에 대한 걱정이 많은 지인들이 있습니다. 실패가 두려워 도전을 망설이는 모습들이었습니다. 의욕이 없어 세상 탓을 하거나, 자괴감에 빠진 경우도 많더군요. 공통점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최근 만난 한 친구는 어머니로부터 “너는 애가 무슨 곰팡이마냥 집 한구석에서 꼼짝도 안 하고 있느냐"며 ‘곰팡이' 같다는 말도 들었다고 합니다. 심심한 위로를 전하며 곰팡이를 곱씹게 된 계기였습니다. 

곰팡이에게 좋은 감정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오랜만에 냉장고 속 재료를 꺼내 요리를 해볼까 하다가도 우리를 맥빠지게 만드는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집 안이나 음식물에 피어 있는 곰팡이를 볼 때면 기분이 썩 좋지 않죠. 일단 겉모습이 비호감입니다. 흉한 외관뿐만 아니라 무좀, 비듬 등의 피부 질환을 일으킨다고 알려져 곰팡이는 인간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전문가에 따르면 곰팡이의 종류는 최소 3만 종 이상이라고 합니다. 

맛있는 곰팡이?! 

그런데 곰팡이가 부정적인 구석만 있는 건 아닙니다. 수많은 전염병 환자를 치료했던 항생제 ‘페니실린’은 푸른 곰팡이균의 일종인 ‘페니실리움 노타툼(penicillium notatum)’으로 만들어집니다. 2014년 6월 25일 과학 학술지 <네이처>는 막걸리 양조에 이용되는 누룩곰팡이가 이러한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병균을 무력화할 수 있다고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곰팡이는 맛을 내는 데에도 쓰입니다. 치즈, 된장 같은 발효 식품이 대표적이죠. 맥주, 와인 등의 주류를 양조하는 데에도 사용됩니다. 어떤 곰팡이는 와인을 더 달콤하게, 더 향기롭게 만들어줍니다. 이 와인에 쓰이는 곰팡이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겠습니다. 

귀부(鬼父) : 고귀한 부패 

보여지는 모습과는 다르게 값비싼 가치를 생산하는 곰팡이가 있습니다. 달콤한 맛이 특징인 ‘귀부 와인’을 만들 때 활약하는 곰팡이입니다. ‘고귀하게 썩다’ 노블 랏(nobble rot)이라 불리는 곰팡이균 ‘보트리티스 시네레아(Botrytis Cinerea)’가 바로 그 주인공이죠. 

보트리티스 시네레아는 특정 기후 조건에서 포도에 생기는 회색 곰팡이입니다. 조건이 까다롭습니다. 우선 곰팡이가 생기기 위해 습도가 높고 밤과 새벽에 안개가 많이 껴야 합니다. 온도 섭씨 20o~25o, 습도 85%~95% 정도가 적당합니다. 포도 껍질에 곰팡이가 달라붙고 난 후에는 낮의 강한 햇빛이 필요합니다. 햇빛은 곰팡이가 포도를 과하게 썩히는 것을 막아줍니다. 또한 습도는 60% 이하로 떨어져야 합니다.

 

기후 조건뿐만이 아닙니다. 아무 포도에나 생기지 않습니다. 주로 껍질이 얇고 포도알이 촘촘히 붙어 있는 ‘쇼비뇽 블랑’이나 ‘세미용’, ‘리슬링', ‘피노 그리’ 등의 품종에서 자라기 쉽습니다. 알맹이 사이로 환기가 잘 되지 않아야 곰팡이가 생기기 좋습니다. 곰팡이균이 생기면 껍질을 뚫고 들어가야 부패가 진행되기 때문에 껍질이 얇을수록 더 좋은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트리티스 시네레아 균이 포도에 붙어 있다 http://hugel.vin.co/open/index.php?rub=1_7&langue=en
보트리티스 시네레아 균이 포도에 붙어 있다 http://hugel.vin.co/open/index.php?rub=1_7&langue=en

 

와인 강국들의 자부심, 귀부 와인 

곰팡이균이 껍질을 뚫고 들어간 후에는 포도의 수분을 빨아먹습니다. 당분은 그대로기 때문에 당도는 높아집니다. 쭈글쭈글한 건포도처럼 변합니다. 포도의 당도를 높이기 위해 12월 정도까지 수확을 미루면 거의 90% 정도의 수분이 사라집니다. 

귀부 와인은 포도 수확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조건을 갖춘 포도알만 손으로 수확하기 때문에 품이 많이 듭니다. 포도 수확에만 6주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노블 랏(nobble rot), 즉 ‘고귀하게 썩다’라는 별명이 괜히 생긴 것이 아니죠. 귀부 와인은 잘 조성된 테루아(와인을 만들기 위한 지리적, 환경적 요소의 총칭)와 수작업의 결정체입니다. 

이는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으로 대표 되는 구세계 와인의 특성과 자부심을 고루 담고 있는 것이죠. 구세계로 분류되는 국가들은 비교적 오랜 시간 동안 와인을 생산해 왔습니다. 역사와 전통을 통한 강한 자부심이 특징입니다. 

곰팡이? 금팡이! 

 

귀부 와인 샤토 디켐 http://darak75.tistory.com/711
귀부 와인 샤토 디켐 http://darak75.tistory.com/711

 

귀부 와인 중에서도 프랑스 소테른 지방의 귀부 와인 ‘샤토 디켐’은 영국 찰스 왕자와 다이애나 왕비의 결혼식 디저트 와인으로 유명합니다. 양조 과정이 까다롭고, 포도나무 한 그루에서 한 잔 정도만 생산되는 귀한 와인입니다. 

이 와인은 빈티지(생산 연도)와 용량에 따라 2~30만 원 선에서 300만 원을 호가한다고 합니다. 경매를 통해 판매된 샤토 디켐 중 역사상 가장 비싼 제품은 1784년 빈티지로 5만 5800달러(우리 돈 6,743만 원)에 낙찰되기도 했습니다. ‘곰'팡이를 넘어서 ‘금'팡이라 불릴 만 합니다. 

힘들 땐 ‘균생 역전’ 보기 

달콤한 곰팡이 보트리티스 시네레아. 와인 양조에 사용되기 이전에는 그저 농작물을 썩히는 곰팡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쓰임새가 생긴 후 ‘고귀한'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비록 우연한 발견에서 시작된 것이긴 하지만 원래 가지고 있던 가능성이 잘 활용된 경우입니다. 

어쩌면 사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지금 당장에 해낸 것이 없다고 해서 앞으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설령 지금 내 모습이 곰팡이 마냥 아쉬워 보여도 스스로를 원망하면 안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죠. 찾으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역할'이 아니라 그 ‘가능성’입니다. 삶이 고단한 요즘, 보트리티스 시네레아 곰팡이의 ‘균생 역전’을 보며 다시 한 번 힘을 내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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