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1차 세계대전 후반이었습니다. 전쟁보다 무서운 전염병이 전 지구를 휩쓸었죠. 많은 사람들이 고열과 심한 기침 등의 증상을 보이다 죽어갔습니다. 당시 세계적으로 추정되는 사망자 수만 당시 전체 인구의 3%~5%인 5천만 명, 많게는 1억 명입니다. 20세기 최악의 전염병으로 불리는 이 병은 바로 스페인 독감(Spanish influenza)입니다.
당시 미국 인구의 28%가 감염되고 50만 명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인도 인구의 5%가 이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일본의 경우 당시 인구 5천만 명의 거의 절반인 2천 3백만 명이 감염되었고, 40만명 가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시 일제강점기였던 우리나라 또한 이 병을 피해갈 수는 없었습니다. 이 끔찍한 열병은 ‘무오년 독감(戊午年毒感)’으로 불렸는데 당시 인구의 절반 정도인 7백만 명 이상이 감염됐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독감에서는 면역력이 약한 신생아와 노인들의 사망률이 월등히 높은 양상을 보이는데 스페인 독감의 경우에는 20세에서 40세 사이의 건강하고 면역력이 강한 성인들도 사망률이 높았습니다. 또한 보통 겨울에 유행하는 일반 독감과 달리 스페인 독감은 여름과 가을에 유행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백년만에 모습을 드러낸 바이러스의 정체 : 조류 독감 바이러스
스페인 독감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2005년 10월 미국 육군 병리학 연구소(Armed Forces Institute of Pathology)는 알래스카에 묻혀 있는 미군 병사 감염자 시신에서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H1N1)를 추출해 내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일종이었습니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조류나 포유류, 사람에게 감염되어 독감(flu)를 일으키는 바이러스로, 유전물질이 RNA 형태로 전달되는 RNA 바이러스입니다. 주로 호흡기를 통해 감염되며 기침, 인후염 등의 호흡기 관련 질환을 일으킵니다.
실험을 주도한 타우펜버그(Taubenberger) 박사와 연구진은 이 바이러스의 유전체를 현재 존재하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유전체와 비교 분석했습니다. 그 결과 스페인 독감을 일으킨 바이러스가 원래는 조류 독감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로부터 유래했음을 밝혔습니다.
연구진은 바이러스가 1913년에서 1918년 사이에 인간에게로 넘어와 전파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어떻게 조류에서만 전파되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로 넘어올 수 있었을까요?
바이러스는 융합하고 진화한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감염 생물의 세포 내로 침입하기 위해서 표면에 헤마글루티닌(Hemagglutinin, HA)와 뉴라미니다아제(Neuraminidase, NA)라는 두 가지 단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헤마글루티닌과 뉴라미니다아제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고 두 단백질의 조합에 따라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아형(subtype)이 결정됩니다.
미국 질병예방통제센터(CDC)에 따르면 현재까지 약 18종의 헤마글루티닌이, 11종의 뉴라미니다아제가 밝혀져 있고 계속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18X11=198종의 서로 다른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존재할 수 있는 셈입니다.
조류독감은 주로 H5N1의 아형을 가지고 있고 최근 H5N6등의 변형된 형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감염될 수 있는 스페인 독감은 H1N1, 올해 유행하는 A형 독감은 H3N2의 아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감염은 종 특이적입니다. 사람 호흡기에 있는 수용체는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표면 단백질(H5N1)과 맞지 않기 때문에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일반적으로 사람에게는 감염되기 힘듭니다.
돼지가 연결고리?
하지만 타우펜버그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돼지와 같이 조류 독감과 사람 독감에 동시에 감염될 수 있는 가축이 있으면 두 바이러스는 돼지의 세포 내에서 서로 융합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돼지를 바이러스 융합 운반체(Mixing Vessel)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연구진은 야생 새들에서 돼지로 바이러스가 이동했고 바이러스가 돼지의 체내에서 변이를 일으켜서 사람에게 감염될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고 추측했습니다.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세포 내에서는 껍질이 벗겨지고 RNA 상태로만 존재합니다. RNA는 DNA보다 훨씬 불안정해서 돌연변이가 일어나기도 쉬우며 세포 내부에서 서로의 가닥이 재조합되기 쉽습니다. 특히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경우 유전체 재배열(reassortment)이라는 기전으로 서로 다른 기원의 두 바이러스가 재조합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재조합 된 바이러스는 기존 바이러스의 독성을 가지면서도 인간에게 감염될 수 있는 표면 단백질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바이러스 폭풍이 몰려올 수 있다
다시 스페인 독감으로 돌아와 볼까요. 스페인 독감의 대 유행은 고대의 전염병, 천연두나 중세의 흑사병 유행과는 그 양상이 아주 다릅니다. 위생 상황이 열악하고 질병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으며 온갖 미신적인 치료 방법이 횡행하던 먼 옛날과는 달랐습니다.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던 1900년대 초반은 현대적인 의료 체계가 세워지고 도시의 위생 상태는 선진적이었으며 계몽적인 의학자들의 연구로 질병 예방에 대한 지식이 충분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스페인 독감은 엄청난 위력으로 전 지구를 휩쓸었습니다.
걱정스러운 점은 지금도 상황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미국 질병예방통제센터(CDC)의 감독관인 Julie Gerberding 박사와 Anthony Fauci 박사는 CIDRAP과의 인터뷰에서 “만약 현재의 조류 독감 바이러스가 변종 돌연변이를 통하여 인간에게 쉽게 감염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한다면 충분히 인간에게 광범위하게 널리 퍼질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도 20일 국회 대정부 질의에 출석해 최근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조류 인플루엔자가 “매번 돌연변이가 생기기 때문에 기존 방역 대책으로는 미진한 부분이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조류 독감 파동이 정례화되는 듯한 불편한 현실 속에서 방역 당국의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입니다.
학생 기자단 현규환(kinggury1@scientist.to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