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 전염병, 현실 속 연구 대상!?
게임 속 전염병, 현실 속 연구 대상!?
  • 김영돈
  • 승인 2017.01.13 20:40
  • 조회수 18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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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염된 피' 사건 발발

'오염된 피'가 퍼진 WoW 마을의 모습, 출처 페퍼먼 교수의 논문
'오염된 피'가 퍼진 WoW 마을의 모습, 출처 페퍼먼 교수의 논문

2005년 9월 13일 온라인게임 월드오브워크래프트(WoW)에서 ‘오염된 피’라는 전염병이 창궐했습니다. 수 많은 캐릭터들이 회색화면, 즉 죽음을 봐야했던 사건이었죠. WoW는 2004년 11월 출시 이후 이듬해 9월 당시 유저 400만 명 이상이 즐기는 세계 최대 규모의 온라인 게임이었습니다. 때문에 이 '오염된 피' 사건은 게임 유저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됩니다.

 

영국의 BBC가 사건 발생 직후인 9월 22일 “'오염된 피' 사건은 게임 개발자들이 예상하지 못한 치명적인 버그”로 인해  발생했다고 분석하며 “수천명이 넘는 유저들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학카르의 모습, 출처 페퍼먼 교수의 논문
학카르의 모습, 출처 페퍼먼 교수의 논문

전염병의 원인은 새로 등장한 사냥터 '줄구룹(Zul'Gurub)'의 마지막 우두머리 혈신 학카르였습니다. ‘오염된 피(Corrupted Blood)’는 학카르가 사용하는 능력 중 하나습니다. 오염된 피에 피격된 캐릭터는 2초당 200의 지속적인 피해를 입습니다. 무엇보다 '주변'에 같은 증상을 전염시키게 됩니다. 게임상 ‘디버프’라고 하는 병에 걸린 것이죠.

 

2005년 최고 레벨 캐릭터들의 체력이 2,000에서 5,000 정도 였습니다. 디버프에 걸렸다고 즉사하는 수준은 아니었죠. 다만 낮은 레벨 캐릭터의 경우 체력이 낮아서 디버프에 잠깐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치명적이었습니다. 고레벨 캐릭터도 지속적인 치료를 받지 않으면 죽을 수 있었죠.

 

게임상 전염병이 창궐한 핵심적인 문제는 디버프 치료법이 상당히 복잡했다는 점입니다. 디버프에 걸린 캐릭터는 학카르의 능력 ‘피의 착취’에 맞거나 해당 사냥터 밖으로 나가야만 해제가 가능했습니다. 최후의 수단으로는 죽어서 다시태어나는 방법이 있습니다. 플레이어가 가진 자체 능력만으로는 치료할 수 없었죠.

 

당시를 기억하는 회사원 임거혁(32세)씨는 “학카르의 디버프는 ‘사냥터를 나가는 행위’로만 치료 할 수 있었다”며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경로로 사냥터를 빠져나가면 치료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오염된 피, 정부 연구와 학계 논문에?

 

보스턴 터프츠 대학교의 수리생태학자 페퍼먼은 의학저널 <란셋>에 ‘오염된 피’ 사건과 관련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미국의 질병통제센터 CDC는 개발사인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측에 연구를 위한 자료를 요청하기도 했었죠. 

가상 세계에서 벌어진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 법한 사건이 외신을 비롯해 학계의 관심까지 받게 되는 건 지극히 이례적입니다.

'오염된 피'의 감염 경로, 출처 페퍼먼 교수의 논문
'오염된 피'의 감염 경로, 출처 페퍼먼 교수의 논문

<란셋>에 발표된 페퍼먼의 논문은 ‘펫(Pets)’을 주요 감염 경로라고 분석합니다. WoW에서 펫은 플레이어에게 다양한 도움을 주는 존재입니다. 펫은 외부적 요인으로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펫의 죽음은 플레이어에게 상당한 불이익입니다. 때문에 사냥터에서는 잠시 꺼냈다가 펫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회수 할 수 있죠.

 

페퍼먼의 논문에 따르면 소수의 플레이어들이 ‘줄구룹’ 사냥터에서 펫을 꺼냈다가 ‘오염된 피’에 감염된 펫을 회수했다고 합니다. 이 플레이어들이 사냥터를 나와 마을에서 펫을 다시 꺼냈고 감염된 펫으로 인해 ‘오염된 피’가 마을에 퍼지게 됐다는 분석입니다.

 

죽지 않는 NPC, 사건 키워

WoW의 NPC, 출처 월드오브워크래프트 공식 홈페이지
WoW의 NPC, 출처 월드오브워크래프트 공식 홈페이지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은 멀리 전파되기 전 환자가 사망하기 때문에 널리퍼지지 못합니다. 플레이어들이 마을에서 ‘오염된 피’에 걸렸더라도 외딴 곳으로 도망쳐 죽었다면, 이렇게 많은 희생자를 기록하지 못했겠죠.

 

그런데 '사태'의 확장은 엉뚱한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WoW 속 마을에는 NPC(Non-Player Character)라고 불리는 캐릭터들이 있습니다. 주로 상점에서 물건을 팔거나 게임 진행에 필요한 임무를 제공하는 플레이어가 아닌 캐릭터들인데요.

 

NPC들은 24시간 마을에 있습니다. 피해를 입거나 디버프에 걸려도 생명력이 무한정 회복되어 죽지않습니다. 때문에 ‘오염된 피’에 감염되어도 죽지 않죠. NPC가 통제할 수 없는 ‘보균자’가 되어 옆을 지나는 플레이어들에게 병을 옮긴 점이 전염병 확산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현실 속 전염병 창궐 시 인간과 유사해

‘오염된 피’에 감염된 사람들은 현실 속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페퍼먼의 논문에 따르면 플레이어들은 캐릭터의 감염을 자신이 병에 걸리는 것과 동일시했으며, 이를 극복하려는 사람과 악용하려는 사람들로 나뉘었다고 합니다.

 

‘오염된 피’를 극복하려고 했던 일부 플레이어들은 치료 능력을 이용해 감염된 플레이어들을 치유하려고 했습니다. 무용지물인걸 알면서도 말이죠. 어떤 플레이어들은 ‘오염된 피’에 감염된 지역을 피하도록 타 플레이어에게 정보를 줬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감염자로 의심 되는 외부인을 통제하는 세력도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치료는 불가능 했고 병은 오히려 다른 도시로 퍼졌습니다. 2015년 메르스 사태 당시처럼 ‘오염된 피’에 감염된 줄 모른채 지역을 이동했거나, 심지어 고의로 병을 감염시키려고 했던 플레이어들 때문입니다. 일부 플레이어들이 감염자들에게 가짜 약을 팔아 돈을 챙기는 일까지 발생하는 등 대규모 전염병 발생시 나타나는 행동 유형이 재현됐다고 페퍼먼의 논문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국 서버 리셋으로 해결

당시 상황을 보도한 BBC의 기사
당시 상황을 보도한 BBC의 기사

2005년 BBC의 보도에 따르면 당시 ‘오염된 피’ 사건의 피해를 입은 서버는 북미 지역의 ‘Archimonde’를 포함해 최소 3개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제작사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는 특정 지역의 전염병을 제거하는 등의 조치로 사태를 해결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최초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으로 서버를 되돌릴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서버 리셋과 동시에 ‘오염된 피’는 지속 시간이 매우 짧은 디버프로 바뀌었습니다. 한국 서버의 ‘줄구룹’ 사냥터에는 이 버젼의 ‘오염된 피’가 적용되었기 때문에 한국 플레이어들이 피해를 입는 일은 없었다고 하네요.

 

온라인 게임의 또 다른 가능성

이 사건을 연구한 페퍼먼은 자신의 논문에 “동물을 이용한 연구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며 “ 시뮬레이션보다 실제 상황에 훨씬 유사한 ‘온라인 게임’이 인간 행동 연구를 위한 매력적인 풀(poll)을 갖춘 실험실로 쓰일 수 있을것”이라고 서술했습니다.

 

실제로 대규모 전염병에 대항하기 위한 EpiSimS(병원체와 감염 경로에 따른 확산 예측 모델), FluTE(인플로엔자 확산 예측 모델), GLEAM(전세계 단위 전염병 확산 예측 모델)와 같은 시뮬레이션 모델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인간이 활동하며 만들어 내는 많은 변수를 전부 고려할 수 없기 때문에 온라인 게임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의미였죠.

 

이러한 시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예일대의 테러전문가 스튜어트 고틀리브는 “현실 분석의 도구로서 게임을 이용하는 것은 어렵다”며 “WoW에서 죽는 것은 단순히 ‘귀찮을’ 뿐”이라고 가상 현실과 현실 사이의 선을 강조했습니다.

 

작금의 게임은 단순한 유희로 치부하기에는 현실과 매우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물론 게임 속 삶은 분명히 현실과 차이가 있죠. 가상 현실 세계를 무시할 수 는 없지만 이를 ‘연구 대상으로 삼아도 좋은가’에 대한 논란은 계속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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