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뇌 손상으로 얻은 "뜻밖의 그림 실력"
좌뇌 손상으로 얻은 "뜻밖의 그림 실력"
  • 강지희
  • 승인 2019.06.24 12:25
  • 조회수 4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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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애덤스. 출처: 유튜브/NOVA PBS Official
앤 애덤스. 출처: 유튜브/NOVA PBS Official

앤 애덤스는 원래 교수였습니다. 애덤스는 물리학과 화학을 전공했는데요. 35세가 되던 해에는 난소 표면 상피를 연구해 세포생물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죠. 그 후 애덤스는 4년간 대학에서 교수로 일했습니다.

 

46세 어느날

앤 애덤스의 초기 작품. 출처: UCSF Memory and Aging Center
앤 애덤스의 초기 작품. 출처: UCSF Memory and Aging Center

1986년 46세가 되던 해에 애덤스는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한 아들을 돌보기 위해 교수 일을 그만뒀습니다. 이 때부터 애덤스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요. 애덤스의 초기 작품은 고전적이고 단순한 편이었습니다. 간단한 그림이나 건축 수채화가 많았죠. 그 후 6년 간 애덤스의 그림은 매우 정밀하고 대담하며 강렬하고 추상적인 스타일로 진화했습니다. 여기에는 생각지 못한 비밀이 숨어 있었습니다.

 

53세에 창의력 절정?!

 

52세가 될 무렵 애덤스는 음악과 같은 청각적인 자극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 해 53세였던 애덤스는 모리스 라벨의 대표적인 교향곡 <볼레로(Bolero)>에서 영감을 얻어 <언라벨링 볼레로(Unraveling Bolero)>를 완성했습니다. <볼레로>는 무자비한 반복성으로 강렬한 인상을 주는 곡입니다. 리듬이 시종일관 집요하게 반복되다 마지막에 맞이하는 클라이맥스로 유명하죠. 

언라벨링 볼레로. 출처: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언라벨링 볼레로. 출처: University of California San Francisco

애덤스는 <볼레로>의 악보를 그림으로 승화했습니다. 악보의 각 마디는 반듯한 직사각형으로 곡의 볼륨은 직사각형의 높이로 표현했는데요. 볼레로에서 일관적으로 유지되는 조를 표현하기 위해 3,236번째 마디까지 통일된 색채 조합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애덤스는 눈에 띄는 주황색과 분홍색으로 마지막 몇 마디를 화려하게 폭발시키며 극적인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음악원(SFCM)의 의장 David Stull은 "애덤스의 그림은 라벨의 곡 볼레로의 리듬을 시각적으로 정확하게 묘사했다"며 극찬했습니다. USCF 신경과학기억 및 노화 센터의 신경과학자 William W. Seeley도 "애덤스는 공감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볼레로를 들으면서 언라벨링 볼레로를 바라보니 이 둘의 동시성은 흡사 유령과 같았다"고 평가했습니다.

 

58세, 깊이를 더하다

앤 애덤스의 '파이' 출처: UCSF Memory and Aging Center
앤 애덤스의 '파이' 출처: UCSF Memory and Aging Center

<언라벨링 볼레로>를 완성하고 4년 후 58세였던 애덤스는 음악에서 숫자까지 포함해 더 추상적인 개념을 그렸습니다. 1998년 애덤스는 <파이>라는 작품을 완성했는데요. 원주율을 나타내는 수학 기호 파이(π)에 나오는 십진수들의 확장을 시각적 매트릭스로 그려내 파이의 무궁무진한 수를 포착해낸 그림이죠. 여기까지만 보면 애덤스는 그저 늦은 나이에 창의적인 재능을 발견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파이> 작업을 마치고 2년이 지난 후 애덤스에게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60세, PPA 증세 나타나다

PPA 증세가 발병하기 시작한 때의 애덤스의 그림. 출처: UCSF Memory and Aging Center
PPA 증세가 발병하기 시작한 때의 애덤스의 그림. 출처: UCSF Memory and Aging Center

2000년 60세가 된 애덤스는 언어 기능과 발화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연설 시작이 어려워졌으며 말을 할 때 문법 오류가 발생했죠. 2년 간은 언어 기능 제외한 나머지 기능들은 보존됐다고 합니다. 이 2년 동안 애덤스는 사진 영역으로 초첨을 옮겨 사실주의를 기반으로 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종종 자연물이나 건축물을 그리기도 했죠.

2002년 때의 앤 애덤스의 그림. 출처: UCSF Memory and Aging Center
2002년 앤 애덤스의 그림. 출처: UCSF Memory and Aging Center

안타깝게도 증상이 악화되면서 언어 뿐만 아니라 운동 기능에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렀는데요. 애덤스는 투병 중에도 그림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았고 붓을 쥘 수 있을 때까지 계속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2007년 6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애덤스는 일차성진행성실어증(Primary Progressive Aphasia, PPA)이라는 신경질환 때문에 언어와 운동 기능에 문제가 발생한 것이라고 합니다. 원발성진행성실어증이라고도 부르죠. PPA는 발화와 언어 기능이 점차 망가지는 퇴행성 신경질환이자 치매 유형 중 5번째로 흔한 형태라고 합니다.

 

PPA 환자들은 최소 2년 동안에는 광범위한 인지 및 행동 장애가 나타나지 않은 상태에서 언어 장애가 점차적으로 진행되는 특징을 보입니다. 시간이 더 지나면 결국 치매 증상과 일치하는 인지 장애를 보이죠. 알츠하이머와 같이 뇌가 위축되며 그 중에서 전두엽과 측두엽이 위축됩니다.

 

알고보니 "좌뇌 손상, 창의성 증가시켜"

전두엽(빨간 동그라미). 출처: pixabay
전두엽(빨간 동그라미). 출처: pixabay

UCSF 신경과학기억및노화센터(UCSF Memory and Aging Center)의 Bruce L. Miller와 William W. Seeley 박사의 연구진은 진단부터 사망까지 애덤스의 뇌를 미리 스캔해놓은 덕분에 분석이 가능했습니다. 분석 결과 애덤스의 뇌는 다른 PPA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좌측 전두엽에 심각한 손상이 나타났으며 손상은 운동 제어에 중요한 피질하 영역인 선조체로까지 확장됐다고 합니다. 연구진은 50대에 만개한 애덤스의 창의성이 PPA의 초기 증상으로 인한 좌측 전두엽 손상 때문에 시작된 것으로 분석했습니다. 좌측 전두엽을 포함한 좌뇌의 손상이 창의성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는 설명입니다.

 

좌뇌와 우뇌는 각각 다른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크게 좌뇌는 언어나 신호를 사용한 논리적 기능을 담당하고 몸 오른쪽의 움직임을 인지합니다. 우뇌는 창조적 발상 등 감각적 기능을 담당하며 몸의 왼편에서 작동하는 움직임을 인지하죠. 그래서 오른쪽 측두엽이 손상되면 비언어적 정보를 상실하고, 반대로 왼쪽 측두엽이 손상되면 언어에 대한 기억을 상실한다고 합니다. PPA와 관련해 좌측 전두엽 영역은 언어 기능 외에도 주의력과 특정 반응을 보이는 능력을 담당합니다. 또한 이 좌측 전두엽 영역들이 우뇌의 창의성을 통제하고 있는데요. 좌측 전두엽이 손상되면 주의력과 반응 영역에 대한 통제력이 상실됩니다. 통제가 느슨해지면 우뇌 영역들에 대한 통제력도 약화되겠죠. 이러한 이유로 창의적 사고가 늘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좌뇌와 우뇌는 이처럼 서로를 돕는 한편 통제합니다.

좌뇌와 우뇌는 경쟁관계다. 출처: pixabay
좌뇌와 우뇌는 각각 다른 기능을 갖는다. 출처: pixabay

한 연구에서는 다양한 뇌 질환을 앓고 있는 40명의 환자와 통제집단을 조사했는데요. 피험자들은 모두 용도 찾기 테스트를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피험자에게 벽돌을 보여주고 문진, 벌레 잡는 도구, 무기 등 그 쓰임새를 최대한 많이 떠올리게 하는 것이죠. 실험 결과 우뇌 쪽에 손상을 입은 환자들의 창의성 점수가 더 낮았다고 합니다. 반대로 두정엽과 측두엽을 포함한 좌뇌에 손상을 입은 환자들의 창의성 점수는 통제집단보다 높았다고 합니다.

책 '체육관으로 간 뇌과학자' 보고 싶다면 클릭!
책 '체육관으로 간 뇌과학자'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준비했다

책 <체육관으로 간 뇌과학자>는 앤 애덤스의 이야기와 함께 뇌와 창의성의 관계를 다양한 사례로 분석합니다. 작가 자신의 이야기와 여러 연구를 풀어내면서 운동과 뇌 가소성의 관계를 이해하고 뇌를 활성화하면 누구나 스스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신경 과학의 관점에서 밝혀내고 있습니다. 

참고로 애덤스의 그림의 모티브가 된 교향곡 <볼레로>를 작곡한 모리스 라벨도 애덤스와 같은 PPA를 앓고 있었다고 합니다. 라벨과 애덤스 둘 다 PPA 초기 증상을 겪었을 때 반복에 집착했으며 각각 <볼레로>와 <언라벨링 볼레로>라는 걸작을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저자 웬디 스즈키는 뉴욕대학교 신경과학센터의 신경과학및심리학 교수다. UC샌디에이고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즈키의 전문 연구 분야는 뇌가소성이다. 특히 장기 기억력 연구 분야에서 명성을 떨쳤다. 운동과 뇌가소성의 관계를 다룬 테드(TED) 강연으로 640만 이상 조회수를 기록했다. 실험심리학을 연구하는 40세 이하 과학자에게 수여되는 트롤랜드 연구상을 수상했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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