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폭탄 하면 즉각 '버섯구름(Mushroom Cloud)'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이완 라이스 모루스의 책 <옥스퍼드 과학사>에 따르면 핵폭탄, 원자폭탄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버섯구름은 냉전시대 실험물리학의 위험성을 상징하게 됐는데요. 원자폭탄, 핵폭탄이 터지면 왜 버섯구름이 나타날까요?
핵폭발에서 버섯구름이 생기는 이유
원자폭탄이 폭발하면 지면 근처에 매우 뜨겁고 밀도가 낮으며 압력이 높고 부피가 거대한 기체가 형성됩니다. 일반적으로 원자폭탄은 폭풍파가 모든 방향으로 발휘하는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지면보다 높은 공중에서 폭발하기 때문이죠. 원자폭탄에서 나온 뜨거운 기체는 끓는 물속에서 상승하는 기체 방울들과 마찬가지로 위쪽의 밀도가 높은 공기 속으로 가속하며 상승합니다.
상승 흐름의 중심에서는 계속 연기와 잔해가 상승해 기동 모양이 형성됩니다. 반면 가장자리에서는 난류 소용돌이들이 형성되면서 부분적으로 아래를 향하는 흐름이 만들어지죠. 폭발의 중심에 있던 물질은 기화하고 수천만 도로 가열돼 풍부한 X선을 방출합니다. 그 X선은 위쪽 공기의 원자 및 분자들과 충돌하면서 에너지를 전달해줘 백색 '섬광'을 일으킵니다.
이 섬광의 지속 시간은 최초 폭발의 크기에 좌우됩니다. 상승하는 기체 기둥은 토네이도처럼 회전하면서 지면으로 물질을 빨아들여 버섯의 '줄기'를 형성합니다. 줄기는 확대되면서 밀도가 줄어듭니다. 결국 위쪽 공기와 같은 밀도가 되죠. 그러면 줄기는 상승을 중단하고 옆으로 퍼집니다. 그 결과 지면에서 빨아올린 모든 물질이 다시 지면으로 돌아가면서 광범위한 지역에 방사능재가 떨어집니다.
TNT를 포함한 평범한 폭탄이 폭발하는 모습은 핵폭탄과 사뭇 다릅니다. 왜냐하면 순전히 화학적인 폭발로 형성되는 초기 온도가 핵폭발로 형성되는 초기 온도보다 낮기 때문입니다. 낮은 온도에서는 기체들이 줄기와 갓을 갖춘 버섯구름이 되지 못하고 난류를 형성해 뒤섞입니다.
그렇다면 최초로 버섯구름을 형성한 원자폭탄의 폭발은 언제 발생했을까요? 바로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 주 로스앨러모스 남쪽 340km 지점에서 실시된 '트리니티 핵실험'에서 일어났습니다.
최초의 버섯구름 만든 맨해튼 프로젝트
맨해튼 프로젝트는 1939년 상대성이론으로 유명한 아인슈타인이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시작됐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일종의 경고였습니다. 원자폭탄이 이론적으로 그리고 기술적으로 가능할 뿐만 아니라 독일이 이미 만들기 시작했다는 내용이었죠.
아인슈타인의 유명세 덕분에 편지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결과 전례 없는 대규모 실험자원이 동원되고 조직화가 이뤄졌습니다. 1942년 루즈벨트 대통령은 육군 공병대의 건설 부문 참모차장이었던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을 프로젝트의 총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실험은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라는 평범한 이름으로 위장됐습니다.
1942년 말 시카고대의 엔리코 페르미의 연구진이 스스로 지속되는 핵 연쇄 반응을 일으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로부터 그로부터 몇 달 후 필요한 우라늄 동위원소를 산업 규모로 분리하는 작업이 미국 테네시주 오크리지에서 시작됐죠. 그로브스는 빠른 속도로 핵분열을 일으키는 실험 연구를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가 지휘하는 연구소에 일임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폭탄을 설계하는 작업의 책임을 맡았습니다. 100명의 연구자들의 활동을 조율해 실험용 원자로를 실질적인 무기로 변환시키는 연구를 진행했죠. 연합군이 과거 조국의 정부를 쳐부수기를 고대하는 유럽의 이론물리학자들이 속속 로스알라모스로 모여들었습니다.
전쟁을 피해서 건너온 과학자들은 미국의 이론 스타일을 배워야했고 실험 연구자들 및 공학자들과 함께 일하는 문화에도 익숙해져야 했습니다. 세계 2차대전의 압박이 철학에 몰두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론물리학자들은 최대한 빠르게 폭탄을 만들 방법을 알아내야 했습니다. 과학자들에게는 그저 빨리 계산을 해내는 것이 관건이었습니다.
실험은 성공했습니다. 1945년 7월 16일 트리니티 시험장에서 최초의 원자폭탄이 놀라운 장관을 연출하며 성공적으로 폭발했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의 연구진이 만든 폭탄은 제대로 작동했습니다. 연구진이 만든 두 개의 원자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와 패트맨(Fat Man)은 1945년 8월 각각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졌습니다.
리틀 보이는 히로시마에서 약 8만 명을 즉사시켰습니다. 패트맨은 나가사키에서 약 7만 명의 인명피해를 일으켰습니다. 1945년 8월 일본은 전쟁에서 항복했습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
나는 죽음이 되었다. 세계를 뒤흔들어놓는
- 로버트 오펜하이머
일본의 원자폭탄의 소식을 전해들은 오펜하이머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몇 시간 동안 멍하니 서있었습니다. 소식을 같이 들은 엔리코 페르미도 눈물을 흘리며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연거푸 반복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우리는 철 모르는 어린애에게 다이너마이트를 장난감으로 줬다"며 탄식했습니다.
전쟁의 승리로 물리학은 국가 안보에서 급작스럽게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물리학은 연방 정부로부터 엄청난 자금을 받았습니다. 물라학자들도 군사적 자산이 됐죠. 이에 따라 정부는 물리학자들의 수를 늘리려고 했습니다.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을 물리학자로 교육시키고 훈련해야 했습니다.
미국은 많은 사람들을 빠르게 물리학자로 키워야했습니다. 때문에 철학을 중점으로 두는 유럽과 다르게 미국의 물리 교육은 계산과 문제 해결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또한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갔던 유럽의 물리학자들은 미국의 막대한 지원 덕분에 미국에 그대로 머물렀죠. 미국의 이론물리학은 점점 이론물리학의 표준이 됐습니다.
'물리학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는 생각은 냉전시대에 예상치 못한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비밀 제조법'이라는 개념이었는데요. 미국 정부는 종이 위에 휘갈겨 쓴 짧은 공식이나 그림이 적의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이론상의 비밀은 공학적 비밀과 달리 쉽게 이동하거나 누출될 수 있다고 여겨졌죠. 그 결과 이론물리학자들은 필수불가결한 인재인 동시에 의심의 대상이 됐다고 합니다.
이완 라이스 모루스의 책 <옥스퍼드 과학사>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실험과 맨해튼 프로젝트가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미친 영향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줍니다. 또한 천문학, 생물학 등의 과학이 어떤 시행착오와 과정을 거치며 발전하고 성장했는지 여러 재밌는 예시를 들며 알려줍니다.
##참고자료##
- 이완 라이스 모루스 외 <옥스퍼드 과학사>. 반지(2019).
- 존 D. 배로 <일상적이지만 절대적인 생활 속 수학 지식 100>. 동아엠앤비(2016).
- 공공인문학포럼 <잡학 콘서트 핵, 과학이 만든 괴물>. Star Books(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