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셀라병을 예방하려면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우유는 대부분 살균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요. 비교적 낮은 온도인 약 63℃ 온도에서 30분 간 가열해 우유 속 해로운 균을 선택적으로 사멸시키는 공법을 '저온 살균'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유럽과 미국에서 널리 행해지는 공법입니다.
우유를 저온 살균하게 된 배경에는 한 여성과학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앨리스 에번스(Alice Catherine Evans)입니다. 그녀는 미생물학의 태동기에 살고 있었습니다. 1864년 프랑스의 생물학자이자 화학자인 루이스 파스퇴르(Louis Pasteur )는 저온 살균 과정을 고안해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저온 살균 기술은 우유가 아닌 포도주나 맥주에 주로 적용됐습니다. 그 당시에 생우유와 관련된 질병은 많이 알려진 바가 없었는데요. 1차 세계대전 직전, 앨리스 에번스는 저온 살균하지 않은 우유를 마시거나 세균에 감염된 동물을 만지면 브루셀라병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브루셀라병은 브루셀라균에 감염된 동물로부터 사람이 감염되어 발생하는 인수 공통 전염병입니다. 소와 양 같은 가축을 통해 사람에게 전염됩니다. 브루셀라병은 파상열 혹은 몰타열이라고도 부르는데요. 만성적이고 치명적인 고통을 유발합니다. 브루셀라균에 감염되면 1주~3주 정도 잠복기를 거쳐 발열, 오한, 두통, 피로 등 전신 증세가 나타나는데요. 치료하지 않을 경우 사망률은 2% 이하이지만, 아직까지 브루셀라병에 효과적인 치료법이 없을 뿐 아니라 브루셀라병을 예방하는 백신이 개발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예방이 최선인 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18년, <Journal of Infectious Diseases>에 에번스가 브루셀라병을 예방할 수 있는 획기적인 연구를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의학계와 낙농업계에 받아들여지기까진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왜 그녀의 연구는 인정되지 않았던 걸까요?
농부의 딸에서 미국미생물학회 최초 여성 수장이 되기까지
앨리스 에번스는 웨일스 이민자 출신이자 펜실베니아 시골 농부의 딸이었습니다. 대학 교육 2년 과정을 코넬대학교(Cornell University)에서 수학합니다. 여기서 그녀는 세균학에 대한 열정을 키웠는데요. 1910년에 위스콘신대학교(the University of Wisconsin)에서 과학 석사 학위를 마쳤습니다. 모두 세균학 분야였습니다. 이후에는 미국농무부의 동물산업국 낙농과에서 연방직으로 일합니다. 이곳에서 일을 시작하며 그녀는 우유와 치즈의 세균학을 연구했고 브루셀라병을 발견합니다. 에반스는 일반 생우유가 인간에게 질병을 일으킬 수 있고 이러한 위험은 저온 살균을 통해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병원균이 동물과 인간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보고서를 공개하자 그녀는 당시 의사, 수의사, 낙농업계 대표, 세균학자들의 폭풍 같은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그녀의 기록에 따르면 회의론자들이 가장 문제 삼았던 건 여성이라는 ‘성별’이었습니다. 한 남성 연구자는 만약 에번스가 옳다면 다른 남성들이 이미 그 사실을 발견했을 것이라고까지 말했는데요. 이후 남성 과학자들이 수 많은 실험을 통해 에번스의 연구 결과를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에번스의 보고서는 의학계와 낙농업계에 받아들여졌습니다.
왜 여성은 계속 과학계에서 배제될까
책 <인생, 자기만의 실험실>의 저자이자 미국 국립과학재단 첫 여성 총재인 리타 콜웰은 학생시절, 앨리스 에번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동질감을 느꼈다고 회상합니다. 콜웰 박사는 에번스의 인내심과 공중보건에 미친 장엄한 업적 때문에 단번에 그녀를 롤 모델로 삼았다고 합니다. 과학계의 유리천장을 깬 콜웰 박사는 과학계에서 여성에 대한 불평등한 처우가 계속되는 건 제도적이며 사회적인 문제라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2000년 이후 전체 이공계 학사학위의 절반 이상을 여성이 취득했습니다. 생명과학 분야를 보면 1990년대 후반 이후 한 세대 동안 학사학위와 박사학위 절반 이상을 여성이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박사학위를 마친 여성의 39%만이 과학계에서 경력을 쌓을 수 있는 박사후 연구원이 되고 교수직을 얻는 여성은 18%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과학적 명석함과 이공계 학위를 모두 가지고 있지만 여성은 여전히 넘지 못할 무언가에 가로막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콜웰 박사는 "과학계에서 여성을 적극적으로 배제해왔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여기에는 암묵적인 편견이 작용한다고 주장합니다. '무의식적 편견'이라고도 하는 암묵적 편견은 한 때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데 유용했습니다. 우리의 두뇌와 원초적 본능은 자동 반사적으로 우리와 다른 것을 신뢰하지 않는데요. 문명사회 이전에 이러한 암묵적 편견은 생존에 도움이 됐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 암묵적 편견은 다른 사람과 열린 마음으로 교류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가령, 미국 최고 클래식 오케스트라에서 채용 진행 시 성별을 알 수 없도록 커튼 뒤에서 신입 연주자를 오디션하는 관행을 채택한 이후, 여성 음악가의 비율은 40년 간 5%에서 40%로 높아졌다고 합니다. 암묵적 편견을 제한한 이후 나타난 결과였는데요. 이러한 사례들처럼 리타 콜웰은 암묵적 편견을 이해하면 과학계의 채용 관행도 바꿀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과학계에서는 높은 수준의 과학연구 능력은 Y염색체와 연결돼 있다고 믿습니다. 양성평등 면에서 세계 최고로 꼽히는 스웨덴에서조차 과학계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자격이 있다고 인정받으려면 <네이처>처럼 세계적으로 권위있는 과학잡지에 세 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하거나 혹은 해당 분야 최고 잡지에 스무 편 이상의 논문을 게재해야 합니다. 콜웰 박사는 "불행히도 더 계몽된 젊은 남성이라는 새로운 세대를 기다리더라도 과학계의 편견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과학계에서 성차별과의 전쟁에서 여성의 승리는 여전히 요원하다고 말합니다.
책 <인생, 자기만의 실험실>은 학계와 정부, 민간기업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경험을 쌓은 콜웰 박사가 여성 과학자로서 부딪히고 감내해야 했던 현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남성 우월주의가 팽배한 과학계를 먼저 경험한 선배로서 오늘날 과학계에 몸담고 있는 수 많은 여성을 위한 조언과 위로를 건냅니다.
##참고자료##
- 리타 콜웰, 샤론 버치 맥그레인, "인생 자기만의 실험실", 머스트리드 북(2021)
- Colwell, Rita R. "Alice C. Evans: breaking barriers." The Yale journal of biology and medicine 72.5 (1999): 349.